원문 : http://www.blazersedge.com/2011/7/6/2263276/the-history-of-the-portland-trail-blazers-the-championship-era-part-2
77-78 시즌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포틀랜드 팬들이 오랜 충성파 외에는 팀의 챔피언 외에 다른 모습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기적적인 우승으로의 여정 이전에는 팀에 대한 관심이 미미했다. 팬들의 대다수는 77년 플옵 중에 유입되었고, 그들의 팀에 대한(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NBA에 대한) 첫 만남은 우승에 의해 이루어졌다. 우승은 정체성으로 삼을 만큼 자주 있는 사건이나 성취가 아니다. 블레이저스는 대다수의 포틀랜드 팬들이 알고 있었던 유일한 NBA 챔피언이었다. 성공만이 그들의 유일한 경험이었다.
시즌 전반기에 블레이저스는 그러한 정체성만을 확인시켜줬다. 그들은 거의 무적이었고, 첫 50경기에서 42승 8패를 기록했다. 포틀랜드의 안방 신화는 그 기간 동안 계속되었고, 50경기 동안 홈에서 불패였다. 1978년 1월 3일, 13초만에 6점을 득점해서 원정을 온 시카고 불스로부터 승리를 낚아챈 것은 모두가 의심하던 것을 확인시키는듯 했다 : 이 팀은 재능, 기술, 행운, 기타 어떤 조합으로도 포틀랜드에서는 물리칠 수 없었다. 블레이저스는 역대 최고팀 중의 하나로 기록되면서 2연패를 해낼 운명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나는, 많은 홈경기의 전반 도중에 빠져나와 잠자리에 들면서 포틀랜드의 승리를 생생하게 전달하던 빌 숀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데 실망했던걸 기억한다. 나는 곧 우리집 부엌과 거실 모두 난방구가 있고 그 중 하나가 내 방에 연결된 것을 발견했다. 그 구멍에 귀를 바싹 대고 열심히 들어서, 부모님이 듣고 있을 때 나도 관을 통해 라디오를 들을 수 있었다. 담요를 두르고 바닥에 엎드려서 경기가 끝날 때까지 듣고 나서, 다음날 아침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는걸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내 일과가 되었다.
블레이저매니아 또한 도시를 강타했다. 많은 대화가 블레이저스로 시작하고 끝났다. 아이들은 전에 없이 농구공을 잡았다. 어떤 미술이나 작문 과제도 블레이저스에 관련한 주제로 연결되기 십상이었고, 학급의 최소 절반 이상이 자신의 과제에 블레이저스를 연관시켰다. 모두가 블레이저스를 보고 듣고 만지고 '되고' 싶어했다. 어떤 우주비행사, 대통령, 유명인사도 빌 월튼, 모리스 루카스, 라이오넬 홀린스와 나머지 팀원들이 당시에 받았던만큼의 찬양을 받을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어떤 것도 그보다 더 크지는 않았다.
슬프게도 포틀랜드 팬들은 이제 막 상상할 수 없는 추락을 경험하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팀의 심장을 타격했고, 앞으로 한 세대 이상을 변모시켰다. 에덴 동산으로부터의 추방이 가까웠고, 고난과 힘든 시간을 촉발시킨 것은 빌 월튼의 오른발이었다.
1978년 2월 28일,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꿈의 시즌은 끝났다. 슬프게도 정규시즌은 22경기나 남아있었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지만, 한 시대가 마감하려 하고 있었다.
필라델피아 76ers-당시 포틀랜드에 이어 리그 2위-와의 화요일 밤경기 몇 분 만에 빌 월튼은 오른쪽 발목을 접질리고 경기에서 이탈했다. 포틀랜드는 월튼 없이도 그날 밤 손쉽게 승리를 거뒀다. 아이러니하게도 월튼을 영원히 주저앉힌건 발목이 아니라 발목 때문에 쓰러진 동안 수술을 받았던 오른쪽 발의 신경 손상이었다. 합병증 때문에 월튼은 정규시즌 잔여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다. 월튼이 쓰러졌을 때, 포틀랜드는 50승 10패였다. 포틀랜드는 남은 경기를 8승 14패로 마쳤고 여전히 1라운드 부전승을 획득할만큼 좋은 성적이었지만, 그래도 걱정스러웠다.
이같은 사정에도 불구하고, 낙관론이 여전히 우세했다. 포틀랜드는 1라운드를 부전승(역자 주: 당시에는 컨퍼런스별로 6강 플레이오프였으며 현재 KBL 방식과 동일합니다)으로 통과했다. 월튼에게는 재활할 시간이 많았고,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맞붙게 될 컨퍼런스 세미파이널 도중에 복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포틀랜드에게는 여전히 신화적인 홈코트가 있었다. 1년 전에는 더 강한 상대와 붙었고 기대치도 더 낮았지만 우승을 해냈다. 왜 올해라고 다를 것인가?
뿐만 아니라, 팬들이 보기에 포틀랜드는 아직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모리스 루카스는 여전히 놀라웠다. 라이오넬 홀린스는 올스타였다. 바비 그로스, 데이브 트워직, 래리 스틸은 다른 도시에서 많은 홈팀의 올스타들이 그렇듯이 포틀랜드에서 유명하고 인기가 많았다. 포틀랜드는 월튼의 괜찮은 대체자인 톰 오웬스까지 가지고 있었다. 포틀랜드는 농구를 잘 알고, 깨끗한 슛 성공만큼이나 격렬한 다툼 끝의 리바운드나 잘 준비된 스크린을 인정하는 도시로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포틀랜드 팬들이 아직은 전체적으로 그 정도 수준의 경험에는 도달하지 못한 상태었다. 팬덤의 외양은 비슷했지만, 인과관계는 전도되어 있었다. 아직은 팬들이 공격 리바운드 자체를 완전히 인정하고 선수들이 그것을 해냈기 때문에 그들을 응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팬들은 선수들을 응원하고, 그들의 영웅 중 누군가가 해냈기 때문에 공격 리바운드에 감사했다. 팀에서 덜 알려진 선수들을 띄우고 격려하는데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것은 또한 팬들로 하여금 그 덜 알려진 선수들의 능력... 혹은 그들의 능력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을 과대평가하도록 만들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이 포틀랜드 선수들은 월튼이 돌아올 때까지 자리를 사수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잘 돌아갈 터였다.
시애틀 슈퍼소닉스는 1차전에서 포틀랜드를 손쉽게 격파하면서 다른 의도를 드러냈다. 포틀랜드의 플옵 사상 첫 홈경기 패배였다. 우려가 포틀랜드의 의식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포틀랜드가 상대팀으로부터 홈경기를 빼낼 것으로 되어있었지, 그 반대는 아니었다. 홈코트의 기구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어쨌든 아직 6경기가 남았다. 포틀랜드는 2차전을 승리했지만, 시애틀에서 열린 3,4차전을 패배했고, 4차전은 겨우 2점차였다. 다시 한번 이것은 접전에서 거의 다 승리했던 전년도의 정반대인듯 했다. 포틀랜드는 5차전을 잡아내면서 2승 3패로 추격했다. 포틀랜드가 7차전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시애틀에서의 6차전을 승리해야했고, 포틀랜드의 신도들은 7차전을 승리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포틀랜드는 전혀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포틀랜드는 시애틀에서 접전조차 벌이지 못하고 소닉스에게 105-94로 무너졌다. 빌 월튼은 2경기만을 뛰었고,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영광으로 가는 길은 갑자기 절벽에서 끝났다.
나는 6차전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한다. 가장 뚜렷한 기억은 남은 시간 동안 컴백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상상할 수 없던 파멸을 시계가 알리는걸 지켜볼 때의 아픈 느낌이다.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는 불신이었다. 마지막 버저가 울릴 때, 내 속에는 분화구 크기의 구멍이 생겼다. 나는 충격 속에 방을 나와 적어도 이후 며칠 동안은 망연자실해 있었다. 어른으로서 돌이켜보면, 이제는 그런 반응이 어떤 죽음 후의 경험과 유사했음을 안다. 두가지 별개의 사건의 심각성을 동일선상에 놓지는 않지만 말이다. 나의 반응을 돌이켜보면, 아이로서 포틀랜드의 패배에 반응했던 방법은 가족의 죽음에 반응했을 방식 - 침묵, 혼란, 뭔가 피할 수 없는 나쁜 것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막을 힘이 없다는 깨달음 -과 유사했고, 그 과정 또한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대부분의 포틀랜드 팬들이 그 순간 비슷한 뭔가를 느꼈을 거라고 믿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반응은 분노나 슬픔보다는 충격, 불신, 무슨 일이 벌어졌고 왜 그랬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다음 시즌이 시작하기 전까지 그 '무엇'과 '왜'의 여파는 느껴지지 않았다. 포틀랜드의 우승 희망으로서의 새 시대의 시작은 바로 여기서 끝나버렸다 (열성적인 팬들은 그것을 천천히 깨닫게 되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룰 것이다. 그러나 우승 시대를 마치기 전에 두 가지의 감상이 있다.
첫째, 짧은 고공비행 후 추락했던 이 시대는 다른 스포츠에서 찾을 수 있는 것처럼 강렬하고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기억을 더듬고 이야기를 다시 쓴다 해도, 나는 이 팀의 놀라운 삶과 비극적 종말로 돌아갈 것이다. 스포츠 영역 밖의 유사한 경험들 - 삶과 죽음, 결혼과 이혼, 줄거운 휴가와 중병 - 을 거치며 이제는 걸러졌지만, 여전히 나는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초창기 포틀랜드에 대한 감정은 이후 삶의 아름다움과 비극을 이해하는 바탕이 되었다. 더 나이 들고 지친 사람일지라도, 나는 이 사건들이 감정선을 깊이, 거의 근원까지 건드렸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승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정말 순수하고 열려있었다. 1년 뒤 비수가 날아와 꽂혔을 때, 우리는 계속 열려 있었고 무방비 상태였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졌는지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챔피언의 정체성을 받아들였지만 1년만에 그것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대체할만큼 훌륭한 또다른 정체성을 오랫동안 찾아 나섰다... 그 탐색은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이 짧은 시기에 포틀랜드 팬덤의 수많은 기본원칙이 형성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현재까지 이어져온 문화 중 어떤 기본원칙들이 이 시기에 자리잡았을까?
-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믿음. 병 속에 전기를 가두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현상이고, 병적인 낙관주의는 그에 대한 최고의 환영이다.
- 훌륭한 팬은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인식, 실제로 홈경기의 성적에 영향을 준다.
- 레이커스에 대한 적대감
- 그보다 약간 덜한 소닉스에 대한 적대감
- 덜 알려진 선수들의 공헌에 대한 믿음, 가끔은 그들에 대한 과대평가로 이어진다.
- 감독의 힘에 대한 믿음
- 특정한 스타 개인보다는 팀에 대한 신뢰와 감사. 가끔은 반짝 스코어러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 스몰타운 언더독으로서 큰 기회를 잡을 수는 있지만 항상 좌절하는 정체성. 가끔은 레이커스처럼 영원한 '승자'의 정체성을 부러워한다.
- 부상 악령에 대한 만성적 공포, 특히 센터에 대한 것.
심판이 포틀랜드를 싫어한다는 의혹을 제외하고, 위의 목록에 '포틀랜드 신조'의 모든 기준을 적어넣었다. 1976-78의 유산은 좋든 나쁘든 포틀랜드 팬들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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