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zer's Edge

[8]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역사 - 파이널 이후의 쇠퇴

chalupa 2011. 8. 23. 16:57


원문 : http://www.blazersedge.com/2011/7/24/2291431/the-history-of-the-portland-trail-blazers-the-post-finals-decline







  우리가 지난 편에서 포틀랜드에 대한 추억여행을 끝냈을 때, 검정과 빨강 유니폼의 친구들은 역사상 최고의 3년을 막 마쳤다. 클라이드 드렉슬러, 테리 포터, 제롬 커시, 벅 윌리엄스, 케빈 덕워스는 3년간 2번을 NBA 파이널까지 밀고 올라갔으며, 파이널에 가지 못한 시즌에는 정규시즌 63승을 달성했다. 불행히도 포틀랜드는 파이널에 오를 때마다 모자랐으며, 1990년에는 디트로이트에게 1992년에는 시카고에게 패배했다. 가장 열성적인 포틀랜드 팬조차도 운명의 여신이 언제나 이 팀을 편들어줄 것인지 의문을 품었다.


  1992년 여름에는 2가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로스터에 경험과 가변적인 가드 플레이를 주었던 대니 에인지가 피닉스 선즈로 떠났다. 포틀랜드는 골든스테이트의 베테랑 마리오 엘리로 에인지를 대체했다. 더욱 중대하게도, 포틀랜드는 시장으로 손을 뻗쳐 원하던 PG 로드 스트릭랜드를 낚아챘다. 스트릭랜드는 최근에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있었다. 가을의 첫 낙엽처럼, 이제 혼잡해진 백코트에 스트릭랜드의 가세는 포틀랜드의 날씨에 변화를 예고했다. 포틀랜드는 지배적인 구단으로서의 지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해결책 : 재능을 추가해서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이 자주 시도된 공정의 문제점은 여러가지였다.


- 위대한 팀들은 우선 A급 재능 때문에 뛰어난 것이다. 그러한 유형의 선수들은 오픈 마켓에서 FA나 트레이드로는 거의 절대로 구할 수 없다. 전체적으로 더 강해보이는 라인업이라도, 새로운 스쿼드의 최고 성적은 예전 스쿼드의 최고 성적과 같지 않다.


- 케미스트리는 우승 도전에서 보통 핵심 요소다. 그것은 촘촘한 로테이션에서 또는 2명의 압도적인 선수와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는 나머지로 구성될 때 나올 수 있다. 재능있는 선수들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전형적인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의 케미스트리 부족이다. 방금 빛나고 값비싼 계약을 했기에, 영입한 선수들은 그들이 오기 전 공정이 어떻게 돌아갔든간에 자신들이 공정에서 핵심은 아니더라도 중요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 케미스트리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건, 시장이 제공하는 한정된 풀의 선수들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재능은 종종 적합성을 이긴다. 결국 무언가가 너무 넘치고, 선수들로부터 최대치의 성적을 뽑아내지 못하며, 이론적인 재능 상승의 일부분을 실제로는 낭비하게 된다.


- 재능있는 선수들이 시장에 나오는 전형적인 이유 두번째는 가변성의 부족이다. 다른 반쪽을 못하는 위대한 공격수나 수비수는 적군뿐 아니라 아군 라인업에도 스트레스를 일으킨다. 기존의 로테이션은 대개 그런 스트레스를 처리해야 하지도 않았고, 그걸 다룰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


  이 요소들 모두가 스트릭랜드의 계약으로 나타났다. NBA 사람들은 포틀랜드가 아직 더 많은 재능을 여분의 현금만으로 얻을 수 있다며 놀라워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많은 포틀랜드 팬들의 첫 생각은 "이 친구는 2년 전에 머리 위로 멍청한 패스를 던져서 소속팀의 7차전을 날려버리지 않았던가?"와 "세상에 스트릭랜드가 어디서 뛰게 될 것인가?"였다. 이는 자체적으로 키운 재능을 만들어낸다는 증명된 공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처음에 머리를 긁적거리고 손을 떨던 것을 멈춘 후, 포틀랜드 신도들은 흥분에 휩쓸렸다. 아마 한번의 재능 유입은 정말로 우승이 가능하도록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포틀랜드가 8연승을 질주하며 시즌을 시작하자 그 훙분은 약간 더 강하게 끓어올랐다. 그 후 몇번 제동이 걸렸지만, 1월 하순까지 28승 11패의 성적을 여전히 유지했다. F-C 클리프 로빈슨의 출현이 포틀랜드를 이끌었다. 이전의 2시즌에 난사와 패스 안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로빈슨은 92-93 시즌에 정신을 차리고, 평균 19득점 6.5리바운드 2블락을 했다. 로빈슨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모든 면에서 조금씩 하강하던 벅 윌리엄스의 부담을 덜어줬다. 또한 로빈슨은 스트릭랜드에게 또다른 좋은 달리는 표적이 되어주었다. 후자는 이제 때때로 오프가드로 전환하던 테리 포터를 PG 역할에서 분리했다. 


  하지만 시즌의 최대 화두는 드렉슬러의 건강이 되었다. 만성적으로 무릎이 좋지 않던 드렉슬러는 이 시즌 중에 처음은 1월 나중에는 3월에 장기간 결장해야 했다. 드렉슬러의 무릎 문제는 스트릭랜드의 영입을 타당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재능에도 스트릭랜드와 포터의 백코트는 드렉슬러-포터 조합에게 있는 압박감에 근접하지 못했다. 포틀랜드는 살아남았고 자신보다 훨씬 못한 팀들을 상대로 번영했지만, 자신들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 없이는 지배할 수 없었다.


  코트 위에서 스트릭랜드의 능력과 단점은 포틀랜드에서의 첫 시즌 동안 극히 분명해졌다. 스트릭랜드는 예측력 있는 패서이자, 드리블이 빠르고, 속공에서 무지막지했으며, 돌파로 득점할 수 있었다. 반면에 점퍼를 꾸준히 넣을 수 없었고, 코트 중앙의 로고와 똑같은 수준으로 수비했다. 수비적으로 원래 포지션에서 벗어나 SG로 뛰고 있는 포터와 짝을 이루면서 후자의 문제는 막대해졌다. 어느 쪽이 상대팀 PG를 막든 간에, 다른 쪽은 미스매치 상황에 빠졌다. 좋은 백코트를 보유한 팀들은 재빨리 이득을 가져갔다.


  부상과 케미스트리 문제에도 불구하고, 포틀랜드는 92-93 시즌을 존중받을만한 51승 31패로 마쳤고,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62승을 거둔 피닉스 선즈에 이어 퍼시픽 디비전 3위에 올랐다. 컨퍼런스 4번 시드를 받은 포틀랜드는 새로운 컨퍼런스 친구인 찰스 바클리와 피닉스 선즈와의 예상된 대결 이전에 5번 시드 샌안토니오를 먼저 만나는 험난한 여정을 맞이했다. 그 (피닉스와의) 대결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코트 위에 드렉슬러가 있었어도, 샌안토니오는 포스트시즌으로부터 포틀랜드를 거칠게 밀어냈고, 1라운드를 3승 1패로 승리했다. 성공을 거둔 황홀한 3년을 보낸 후, 포틀랜드는 1라운드 탈락의 길로 되돌아왔다.


  이제 더 많은 움직임이 일어날 시기였다.



  1993년 여름에 포틀랜드는 득점력 있는 유망주들을 많이 영입했다. 드래프트에서는 제임스 '할리우드' 로빈슨을 지명했다. 로빈슨은 PG의 사이즈였지만, 득점형 가드의 사고방식과 그걸 뒷받침할 일련의 움직임들을 갖고 있었다. 얼마 후, 포틀랜드는 예전 1라운드픽인 알라 압델나비를 밀워키 벅스로 보내고 UCLA 출신의 샤프슈터 트레이시 머레이에 대한 권리를 받았다. 머레이는 연습때 하프코트에서 일상적으로 슛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아마 더욱 충격적이게도 포틀랜드는 C 케빈 덕워스를 워싱턴 불리츠로 보내고 F 하비 그랜트를 받아, 파이널에 올랐던 예전의 코어를 깼다. 스트릭랜드처럼 그랜트도 재능이 있었다. 워싱턴에서는 주력 선수로 3년 연속 평균 18득점 이상을 했다. 또한 스트릭랜드처럼 그랜트도 포틀랜드가 곧 발견하게 될 한계를 갖고 있었다.


  덕워스 트레이드로 포틀랜드는 C 크리스 더들리를 영입할 수 있었다. 더들리는 예일대 출신의 리바운드와 샷블라킹이 되는 전문 수비수이고, 포틀랜드가 지불한 80만 달러보다 오픈 마켓에서 훨씬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그에 대한 수수께끼는 다음해 여름에 밝혀지게 된다.


  이론상 포틀랜드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백코트에는 여전히 포터, 드렉슬러, 스트릭랜드가 있었다. SF는 커시와 하비 그랜트가 득점과 리바운드를 하고, PF는 클리프 로빈슨이 가득 채웠고 벅 윌리엄스가 리바운드를 하며, C는 더들리가 다른 모든 선수들이 득점하러 간 동안 림을 경계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93년 여름에는 비극이 블레이저스 가족을 덮쳤다. 1993년 6월 7일, 전 가드이며 이제는 뉴저지 네츠 소속인 드라젠 페트로비치가 독일 아우토반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포틀랜드는 슬픔에 잠겼다. 나는 그날 저녁 스티브 '드림' 위버가 나온 새로 생긴 라디오 방송국 'The Fan'을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기름을 넣으러 내 고물 토요타를 몰고 있었고, 이야기의 중반부 도중에 라디오를 틀었다. 어조로 보건대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난게 확실했지만, 라디오 출연진은 실제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장시간을 얘기했다. 나는 대화에서 정보를 종합해야 했다 : 전 포틀랜드 소속, 절은 나이, 여기 있을때 사랑받았음. 라디오에서 속도 제한이 없고 원하는대로 빨리 운전하는게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시작하자, 나는 바로 아우토반을 떠올렸고, 말했다. "오 안돼. 드라젠은 안돼." 내가 주유소에 도달했을 때, 라디오에서는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내 교류발전기가 엔진 없이는 라디오를 작동시키지 않아서, 나는 주유기에 차를 세우는 대신 부지 한쪽에 차를 세우고 라디오를 듣기 위해 시동을 계속 켜뒀다. 몇 초 후에 라디오에서 전체 스토리를 요약했다 : 드라젠 페트로비치가 28세로 사망했다. 만성적으로 자기 포지션이 아닌데서 뛰고 감독과 불화를 겪을 때조차도 페트로비치가 기분좋은 자유분방함으로 플레이했던 것을 나는 바로 떠올렸다. 나는 페트로비치가 경기 전에 3점을 연습할 때 페트로비치 바로 뒷자리에 앉는 행운을 얻었다. 그 자리는 페트로비치와 림이 일직선이었다. 나는 그전에도 그후에도 그런 슛 장면을 결코 본적이 없다. 공은 말그대로 선을 벗어나지 않았다.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니고... 1밀리미터도 안 벗어났다. 그것은 매번 정확했다. 우리 모두가 젊을적에 그러하듯이, 나는 조금만 더 크고 빠르면 더 높은 수준에서 농구할수 있었을텐데라고 생각하곤 했다. 내게는 약간의 기술이 있었고, 시도도 해봤다. 그날 밤 페트로비치 - 내 사이즈쯤 되는 친구 - 의 슛 연습을 본 것은 내게서 그 환상을 영원히 지워버렸다. 컨디션이 가장 좋은 날에도 나는 그렇게 슛하지 못했다. 내가 3점 라인에서 10개 쏴서 10개를 넣는다면, 모두 다 들어간다해도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페트로비치는 내 분수를 알게 해줬고, 나는 그때문에 페트로비치를 좋아했다. 나는 페트로비치의 죽음을 듣고 며칠간 아픈 가슴을 달랬다. 페트로비치는 포틀랜드로부터 너무 일찍 트레이드 되었고, 삶을 너무 빨리 떠났다. 그게 포틀랜드에서 그의 발자취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래도 다음 가을에 치러야 할 경기들이 있었다. 어떤 일은 정말 잘 굴러갔다. 클리프 로빈슨은 평균 20득점을 넘겼고, 팀에서 핵심 득점원이 되었다. 스트릭랜드는 17득점 9어시스트로 환상적인 한 해를 보냈다. 드렉슬러는 68경기를 버텨냈고, 유일한 장기결장이 1월에 있었다. 몇몇 일은 역시 정말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그 중에 최고는 크리스 더들리가 28경기밖에 못 뛰어서 클리프 로빈슨이 센터를 맡아야했다는 것이다. 잘 득점하고 기동성있게 플레이하며 포틀랜드 소속으로 마지막 위대한 불꽃(이번 시즌 10.4리바운드)을 태운 벅 윌리엄스의 도움을 받았지만, 로빈슨은 팀의 수비적 약점을 막아낼 수 없었다. 마스터 플랜은 중앙에서 Big Stopper 역할을 해줄 더들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나머지 멤버들은 자유롭게 득점하는 것이었다. 그 대신에 로빈슨은 자유롭게 득점했으나 다른 모두의 득점은 떨어졌고, 수비에서는 공을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스트릭랜드와 포터는 아직도 누가 선발 PG로 나갈지 확정되지 않았다. 포터의 성적은 추락했고, 조악한 슛과 노쇠한 육체와 불평의 희생양이었다. 시즌 막판쯤에는 전문 3점슈터가 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커시는 완전히 지워졌고 경기당 17분도 못 나왔다. 하비 그랜트는 그의 입장에서 버스트였고, 두 자리수 득점이 드물었다. 야투율 48% 이상이 익숙하던 드렉슬러는 이번시즌에 43% 이하로 하락했다. 포터와 루키인 트레이시 머레이 외에는 아무도 3점을 성공시킬수 없었다.


  포틀랜드는 93-94 시즌을 47승 35패로 마쳤고, 1라운드에서 휴스턴 로켓츠에게 '모두들 너무도 익숙한' 1승 3패로 탈락했다. 포틀랜드는 재능을 갖췄지만, 과거의 예고는 오늘의 현실이 되었다. 너무 많은 신입 선수들이 과대평가되었고, 팀의 핵심 없이는 기능하지 못했고, 수비할 수 없었으며, 혹은 응집력있는 유닛으로서 서로 잘 맞을 수 없었다. 너무 많은 기존 가드들이 다치거나 새로운 친구들에게 출전시간을 빼앗기는데 불만을 가졌다. 포틀랜드는 격렬한 난장판이었다. 


  실망스러운 시즌의 첫번째 희생양은 릭 아델만 감독이었다. 아델만은 5시즌 남짓 동안 291승을 거두고 경질되었고, 중대한 과도기에 놓인 팀을 두고 떠났다. 아델만과 더불어 GM 조프 페트리도 떠났다. 페트리는 드렉슬러 시절 상승기의 많은 위대한 결정들을 담당했고, 이후 쇠퇴기 중에 덜 위대한 많은 결정들도 담당했다.


  그렇지만 94-95시즌 포틀랜드의 첫 움직임은 훨씬 더 많은 90년대 초반 파이널 진출의 핵심들과 작별하는 것뿐이었다. 전면적인 변화가 지평선 상에 있었다. 새로운 보안관이 도시에 오고 있었고, 전통을 존중하는건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